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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沒)인간적인 세계의 외곽 - 권용철의 첫 번째 개인전에 부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박사과정 강 정 호

 

I

 

얼마 전 글로벌 기업으로 알려진 휴대기기 제조회사가 제품 이용자의 위치를 일정기간동안 위성 추적했던 것으로 밝혀져 논란을 빚었던 적이 있다. 그 때 추적의 증거물로서 폭로되었던 것은 지도 위에 그려진 휴대기기 사용자의 동선이었다. 중첩된 부분이 많은 곡선의 다발로 이루어진 그것은 왠지 동식물의 서식지를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당시 언론에서 문제 삼은 것은 위치 추적으로 인한 사생활 침해였지만 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사람의 일상을 동식물의 분포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나타내고 있는 동선의 몰(沒)인간적인 이미지였다. 그 속에는 오늘날 사회에서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솔직한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세계 전체로 보았을 때 베타적인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사회의 일원인 우리들은 사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지금 우리 앞에서 우정 어린 미소를 짓고 있는 한 사람을, 우리는 얼마든지 물리적으로 측정가능한 점 하나로 환원시킬 수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이 사람을 만나 이루어내는 온갖 세상사는 겉으로 보기엔 사람의 영혼과 자유의지가 반영된 운명적인 사건으로 얘기되지만, 실제로는 점과 점의 우발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는 몰(沒)인간적인 물리 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제 영혼이니 자유의지니 하는 훈훈한 낱말과 결부된 '인간성'을 별로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강조하는 이야기는 폐기되지 않고 일상 속에 더욱 풍성하게 확대되고 있다. 아마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인간답지 않은 시선을 감추는 데에 유용하기 때문일 테다.

 

II

 

권용철의 작품에는 사람들이 기만적으로 감추고 있는 인간사에 대한 냉정한 '진심'이 솔직하게 드러나 있다. 인체 형상을 다루든, 구슬의 움직임을 다루든 그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변함이 없다. 그의 작품에서 사람의 모습은 언제나 내면이 소거되어 있는 물리적인 관계 항으로 나타났다. 이제까지 줄곧 인체 형상을 제작해 왔던 그가 갑자기 구슬을 사용한 키네틱 작품으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도 작품의 일관성이 훼손된 게 아니라 오히려 강화된 것으로 느껴지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아마 이번 개인전에서 권용철의 작품을 처음 보는 관객은 복잡한 철골구조에서 이루어지는 다채로운 구슬의 운동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련의 효과들에 매혹되어, 권용철을 디즈니랜드나 에버랜드와 같은 놀이동산의 미니어처를 구현하는 작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응은 빗나간 것이 아니고, 작가 또한 그러한 감상을 염두에 두었을 테다. 하지만 권용철의 미니어처는 유토피아적인 이미지의 놀이동산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건조하고 생경한 느낌을 준다. 검은 색조로 이루어진 철골구조물은 단지 구슬의 움직임을 떠받치고 있을 뿐, 외관을 꾸미려는 의도를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 고의적으로 노출시킨 듯한 용접 자국, 금속의 차가운 물성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어두운 채색, 구슬의 운동할 때 나타나는 다소 위협적인 분위기 등, (기계 굴러가는 소리와 관련된 표현 추가?) 작품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재미를 추구하는 안락한 미니어처와는 거리가 멀다. 유토피아적인 이미지에 가려져 있는 디스토피아적인 놀이동산의 축소판이라고 하면 적당할까. 아마도 디즈니랜드나 에버랜드를 경영하는 기업가가 놀이동산의 기구를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노출시키면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그들에게 놀이동산을 찾은 사람이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기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운동하며 이윤을 발생시키는 구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몰(沒)인간적인 속내를 감추기 위해 그들은 놀이동산에 유토피아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자신들이 구축한 시스템 속에서 운동하는 '구슬'들이 사람다운 유희를 즐기고 있다고 착각하게끔 만든다.

이에 반해, 권용철의 철골구조에서 구슬은 구슬일 뿐, '인간성'의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는 모두 제거되어 있다. 오랜 세월 인체 형상만을 제작해 왔던 권용철이 자신의 첫 개인전에서 인체 형상을 배제시켜 버린 것 또한 몰(沒)인간적인 시선을 드러내는 데에 있어 인체 형상이 기만적인 환영을 조성하는 불필요한 요소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극사실적인 인체 형상을 제작하였을 때에도, 늘어진 팔다리를 지닌 익명의 군상(群像) 연작을 만들었을 때에도 그와 같은 판단의 실마리는 이미 내재되어 있었다. 실제로 그가 제작하였던 인체 형상은 아무리 사실적으로 만들어도 어딘지 모르게 내면이 소거된 인형 같은 느낌을 주었고, 과도한 제스처를 취하고 있는 신체 기호와 같았다. 그런 까닭에 이번 개인전에서 나타난 형식적인 반전은 그의 작품 진행에 있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고, 그의 작품이 오랫동안 견지해 왔던 논점을 한결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내고 있다. 이제 인간의 형상이라는 표지는 이제 구슬 하나로도 대체할 수 있는 요소가 되었다. 이제 작가가 관심을 쏟는 것은 그러한 '구슬'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양태이다.

 

 

III

 

막대한 자본을 운영하는 글로벌 기업이 불법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사 휴대기기를 사용하는 사람의 위치를 추적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지도 위의 점 하나로 표기된 존재의 사소한 운동에서 어떠한 이윤의 가능성을 보았던 것일까. 아마도 그 기업은 무수한 점들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루어 내는 동선의 양태에서 일정한 경향성을 파악하고자 했을 것이다. 사람을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몰(沒)인간적인 시선에서, 사람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이루어내는 모든 사회 현상은 데이터만 있으면 경향을 파악하고 법칙을 도출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진다. 경쟁 기업에게는 우발적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사회 현상을 특정 기업이 데이터를 선점하여 미리 예측할 수 있다면, 그 기업은 엄청난 이윤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기업은 사회 시스템 속에서 운동하는 사람이라는 변수를 예측가능한 상수로 파악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적으로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렇다면 정말 사람이라는 '구슬'은 데이터만 있으면 예측가능한 상수일까? 그리고 상수로 파악된 구슬이 사회시스템 속에 운동하며 만들어내는 사회 현상 또한 통제가능한 경향과 법칙을 따르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품고 권용철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묘한 기분이 든다. 그의 작품은 '예'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아니오' 라고 대답한다. 그가 만든 철골 구조 속의 구슬의 운동은 이미 확정되어 있는 경로를 따라 반복된다. 구슬의 운동은 작가에 의해 이미 통제되어 있고, 관객 또한 구슬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다. 여기서 구슬은 완전히 파악된 상수로서 철골구조의 시스템 속에 종속되어 있다. 하지만 관객이 철골구조 속에 장악되어 있는 구슬의 운동을 바라보고 있을 때 전시장의 곳곳에서는 어디에서 촉발되었는지 모를 갖가지 기구의 운동이 일어난다. 당연히 관객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관객의 움직임에 반응하여 움직이게 마련인 키네틱 작품이 알 수 없는 요인에 의해 동작하였기 때문이다. 무엇 때문일까? 잠시 후 관객은 기구들의 운동이 철골 구조 속 구슬의 운동에 의해 촉발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폐쇄된 구조 속의 상수가 눈치 챌 사이도 없이 구조 바깥에 존재하는 기구의 운동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로서 작용한 것이다. 관객은 다시 작가의 세계관에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구슬은 여전히 통제가능한 상수로서 존재하는 걸까? 아니면 예측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변수로 존재하는 걸까?

유감스럽게도 권용철의 작품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예'와 '아니오'를 동시에 대답한다. 앞서 언급하였듯 권용철은 사람을 사람처럼 보지 않는 몰(沒)인간적인 시선을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시선을 기만적인 포장 없이 자신의 작품 속에 솔직하게 노출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절대적인 자유의지'니 '교환 불가능한 영혼의 가치'니 하는 말들과 결부된 '인간성'을 권용철 또한 믿지 않는다. 그에게 사람이란 철골구조 속에 종속되어 있는 구슬과 같은 사물이다.

하지만 권용철은 사람이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구축하는 철골구조가 아무리 치밀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즉, 사람이라는 구슬은 특정한 철골 구조가 장악하고 있는 일정 구역 내에서만 예측 가능한 운동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권용철이 자신의 작품에서 보여주듯, 철골 구조는 구슬이 자기 구역 바깥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제권도 행사할 수 없다. 권용철은 작가 노트에서 일상에 종속되어 있는 한 개인이 담배를 피운다는 사건과 산불이 나서 문화재와 산림을 대량으로 소실되었다는 사건은 완전히 독립된 구조를 지니면서도 아무도 모르게 연관되어 있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결국 그 사람은 하나 구슬로서 통제된 일상을 쳇바퀴처럼 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산불이라는 사건을 촉발시켰다. 이는 도저히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모든 사회 현상의 근원에는 이와 같은 연관성이 도사리고 있다.

아마도 권용철의 첫 개인전이 품고 있는 갖가지 논점 가운데 작가에게 가장 첨예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연관성일 것이다. 작가는 오늘날 사람들이 공유하는 몰(沒)인간적인 세계관을 솔직하게 직시하다가 그것의 외곽에까지 눈길이 닿았다. 사람을 좌표상의 점 하나, 혹은 철골 구조 속의 구슬과 같은 존재로 간주하고 통제하려는 그 세계관은 사실 그다지 견고한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것은 구슬의 운동이 '아무도 모르게' 촉발시킨 작용에 의해 너무나 쉽게 무너질 수 있다. 확실히 이번 전시에 작가의 관심은 몰(沒)인간적인 세계관을 기만 없이 드러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한계를 드러내는 외곽에 까지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모르는 연관성'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사람은 어떠한 모습으로 표상되는 것일까? 그 곳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점이나 구슬과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자유의지'나 '영혼'을 운위할 수 있는 영광스런 지위를 다시 회복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가장 성실한 답변을 미래에 제작될 권용철의 작품에서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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